일본사회에서 적응하기
나는 일본에서 대학생 신분 이외에도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면서 한국어교실, 전문학교 등의 강사를 거쳐서 요미우리 문화센터, 한국 대기업에서 일본인 사원 대상의 한국어 수업 강사도 했다.
또,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 관련 잡지인 ‘한국어 저널’에 사진과 음성과 글이 실린 적도 있고, 10년 넘게 유학생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유학생 대상 무료 잡지 ‘월간 유학생’에서 기자활동과 교정 아르바이트도 했다.
또, 한국인 주재원 자녀들의 과외를 하면서, 일본 대학입시를 원하는 학생들을 위한 입시학원에서도 강의도 했고, 번역 및 통역, 일본 출판사의 한국어 검수도 했다.
최근에 들어서 조심스럽게 ‘프리랜서’라고 자기를 소개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장황하게 나열해서, 마치 일본사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성공 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별 것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이모든 것들이 전부 아르바이트에서 시작된 일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주재원으로 나와 계시는 분들의 자녀인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만 했다.
처음에는 보통 아르바이트(도쿄 최저 시급을 기준으로)의 두 배 이상의 시급을 받을 수 있는 과외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비교적 편하게 경제적인 걱정을 덜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너무 행복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생활은 한국이랑 다를 바가 없잖아!’
그랬다. 일본에 와서도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돈을 벌고, 학교를 다니고. 숙제하고 돈 벌기에 급급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에서 내가 하던 대학 생활과 다른 것이 없었다.
나는 일본에 나오면 진정한 대학생활도 즐겨보고, 하고 싶은 공부에 푹 빠져서 밤새도록 공부도 해보고, 아르바이트도 여유있게 하면서 ‘조금은 한국과 다른 삶’을 꿈꾸었었다.
하지만 외국에서의 생활은 생각만큼 녹녹한 것이 아니다.
결국 한국의 생활보다 더 힘들고 고달픈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에는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유학을 계속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생활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외국에서 과외를 해 본 학생들은 알겠지만, 소개를 통해서 구하는 과외는, 한 번 끊어지면 쉽사리 다시 시작할 수 없다.
따라서, 시간이 모자라더라도 과외를 소개받게 되면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짜내야’하는 것이다.
또, 과외를 받는 학생들에게도 ‘주기’가 있어서, 다들 과외를 하는 때가 있으면, 이번에는 다들 학원에 다니는 때가 있다.
그래서, 어떤 학기에는 과외가 너무 많아서 학교 오후수업은 다 빼야 할 때도 있고, 어떤 때에는 과외때문에 수업을 빼 놨더니, 갑자기 과외가 줄어들 때도 있다.
이미 수강 신청기간이 끝난 수업이기 때문에 돌이킬 수도 없이 다음 학기에 대한 부담만 가중되어 버린다.
또, 한국에도 마음대로 갈 수가 없다. 주변에 방학이 되면 한국에 한 달씩 두 달씩 들어가는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과외를 하는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몸도 아프고 스트레스도 많이 쌓여서, 한 달 반을 한국에 다녀온 적이 있다. 물론, 가르치는 학생들의 부모님들께는 방학이 되기 두 세달 전부터 양해를 구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아, 그러세요? 한번씩 쉬시는 것도 필요하죠 뭐. 다녀 와서 연락 주세요.”라고 말씀하셨던 부모님들도, 정작 돌아와서 전화했더니 “아, 이번에 그냥 쉬는 기간도 길고 해서 학원 보내기로 했어요. 죄송해요.” 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처음부터 “한달 반이나 쉬면 안되니까, 과외 선생님을 따로 구할게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셨고, 내가 아예 소개시켜 드린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한 두 집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그만두게 되었고, 그나마 계속 하게 되었던 학생들도 개학하고 두 세달 안에 다 그만두게 되었다. 물론, ‘공부를 많이 시켜야 하는 황금 기간’인 방학때 무책임하게 다른 나라로 가 버린 과외 선생에게도 잘못은 크지만, ‘또 하나의 나’인 대학생의 입장에서는, 방학에는 한국에 가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친구들도 만나서 힘을 다시 북돋워서 일본으로 돌아오는 것이 곧 다음 학기의 에너지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은 힘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또 하나, 과외를 매일하다 보니 건강이 점점 나빠졌다. 왜냐하면, 저녁 끼니를 거르기 때문이다. 간식을 주시는 어머니도 계시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그러다보니 끼니를 맞추어 먹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배가 너무 고파서 밥을 먹고 가면, “선생님, 배고프시죠?”하시면서 부침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하지만, 외국 생활에서 보기 힘든 부침개는 최고의 간식이다!)를 잔뜩 만들어서 주시는 경우도 있고, 말하기 민망하지만, 항상 간식을 많이 주셔서 배가 고픈 것을 조금 참고 과외에 간 날은, 그날 따라 어머니가 안 계셔서 간식을 주시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래 저래 맞추기가 힘들어서 저녁을 굶고 과외를 다 마치고 집에 가면 배가 고픈 마음에 급하게 ‘제대로 된 한 끼니’를 먹고 싶은 생각만 가득해서, 결국 먹는것은 ‘라면’. 밤 10시가 넘어서 먹는 라면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건강의 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를 통해서는, 전혀 일본에서 살고 있는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 문제였다. 한국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학생들을 한국 문제집으로 가르치고, 한국인 부모님들과 이야기하면서 하는 과외만으로는,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아니 얻어야 하는 ‘일본 사회의 경험’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어진 과외를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혹자는 “속 편한 소리 하고 앉아 있네. 하루 종일 몸으로 움직여서 돈 버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어디서 큰 소리야!”라고 이야기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은, 어떤 아르바이트를 하든지에 상관없이, 유학 경비의 대부분을 자신이 벌어서 사용하는 수많은 유학생들에게 공통적인 문제들이다.
이렇게 살고 있던 나에게 주변의 친구들도, “생활에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과외 조금 줄이고 다른 아르바이트에 도전해 보는 건 어때? 몸도 움직이고 일본인이랑도 접할 수 있는 것들 말이야. 그러면 스트레스 푸는 데에도 도움도 될 지도 몰라”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도 ‘그래. 기회가 닿으면 다른 일들에 조금씩 도전해 보자. 쉽지는 않겠지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쉽지않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과외 이외의 일들에 첫 발을 내딛게 된 것은 결국 일본에 온지 만 3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3년째 되던 해 연말 연시에 3주일간 여행을 다녀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과외를 1, 2주 이상 비우기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나름대로 큰 마음을 먹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역시나, 다녀온 후에 일이 반 이하로 줄었다.
마침 방학이고 오후 시간이 비어서 새로운 일에 도전해 봐야겠다고 강하게 다짐했다.
학교 근처에서 카페 겸 식당을 하나 발견했는데, 점심시간 3시간 동안 쓸 아르바이트생을 찾는다고 써져 있었다.
어차피 비는 시간이고, 이렇게 일본 사회에 조금이나마 발을 들여놓자고 생각하고 주 3회 정도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긴시간도 아니고, 큰가게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본인 사장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손님들을 대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한 통의 메일이 왔다.
내가 졸업했던 ABK일본어학교에서 온 메일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고, 어학교 재단 관계자로부터 온 메일이었다.
내가 다녔던 ABK일본어학교는 외국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일본어학교와 함께, 일본인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는 학원도 함께 있었는데, 그학원의 담당자가 보낸 메일이었다.
여러명에게 한꺼번에 보내진 메일이었는데, 어학교 졸업생 가운데서 원어민 교사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관심있는 사람은 이력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드디어 한국어 강사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라고 환호성을 지르고, 이력서를 사러 나섰다.
그랬다. 나는 그때까지 아직 ‘이력서’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